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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오른손과 왼손이 건반 위에서 모든 다른 노래를 불렀다. 타건 마다 세기도 박자도 속도마저도 달랐다. 복잡다단한 내면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며 변덕스러운 감정의 양 끝을 오간다. 평안한가 싶으면 격정이 소용돌이치고, 느릿한 여유를 만끽하다가도 이내 속도를 내며 건반 위의 양손이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손열음이 연주한 슈만의 ‘피아노를 위한 8개의 환상곡, 크라이슬레리아나’였다.
“제가 왜 ‘크라이슬레리아나’와 같은 어려운 곡을 골랐을까 싶어요. 회장님은 한 번도 제가 어떤 곡을 좋아한다고 말씀해 주시진 않았지만, ‘네가 좋아 한국 자동차 회사 하는 곡을 나도 좋아한다’고 이야기해 주셨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을 들려드리고 싶었습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음성이 떨렸다. 무대를 마치고, 몇 번의 커튼콜 이후 마이크를 잡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23일 서울 연세대 신촌 캠퍼스에 자리 잡은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고(故)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의 20주기 추모 음악회에서다. 박해수
손열음은 “‘크라이슬레리아나’만큼 사랑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곡은 없다. 회장님은 저에게 사랑이 뭔지 알려주신 분”이라고 했다.
금호아트홀을 운영하는 금호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낸 고 박성용(1932~2005) 회장은 손열음의 ‘키다리 아저씨’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98년 시작됐다. 강원도에서 올라온 소녀에게 ‘피아노 제도권금융기관조회 ’는 귀한 악기였다. 흔하디흔한 유학도, 뛰어난 선생님도 흔치 않던 시절 원주에서 나고 자란 소녀는 버스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그 시절 손열음에게 첫 피아노를 선물하고, “악기 걱정은 말고 피아노만 치라고 말해준 사람”, 그의 데뷔무대와 세계 무대를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박 명에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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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메디치’로 불리는 故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 [금호문화재단 제공]


손열음은 ‘한국의 메디치’로 불리는 박 명예회장을 통해 시작한 금호영재콘서트의 첫해부터 함께 한 1세대 음악 영재다. 박 회장은 1996년 금호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아 클래식 음악 영재 수익공유형 모기지 발굴에 힘써왔다.
‘피아노 영재’였던 손열음을 시작으로 ‘금호 영재’, ‘금호 영 아티스트’, ‘금호 영 체임버’와 같은 클래식 아티스트 등용문을 만들며 금호문화재단에선 지금까지 2000여명의 음악 영재를 발굴했다. 김선욱, 조성진, 故 권혁주, 선우예권, 김봄소리, 양인모, 임지영, 최하영, 임윤찬, 한재민 등 국내외에서 활약하는 음악가들이 모두 금호에서 발굴한 음악 영재들이다.
송주호 음악평론가는 “박성용 명예회장이 음악계에 남긴 가장 큰 영향은 단연 음악 영재 발굴과 육성”이라며 “오디션을 통한 공정한 선발 방법과 육성 과정, 성장 이후에 마련되는 지속적인 무대 등 오랜 시간에 걸쳐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박 명예회장 별세 두 달 전 금호에서 데뷔 무대에 오른 조성진은 고인이 10주기에 쇼팽 콩쿠르 1위에 올랐다.
이날 추모 음악회엔 고인과 각별한 인연을 이어온 음악가들이 영상을 통해 저마다의 추억을 들려줬다. 1990년대 금호현악사중주단의 리더로 활동하며 박 명예회장과 특히 친밀하게 교류했던 바이올리니스트 김의명은 “음악을 정말 사랑하셨고 넓은 안목으로 음악가들을 도울 모든 길을 생각하셨다”고 했고, 손열음은 “음악 안에서 관심이 없는 영역이 없으셨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모든 땅에 영양분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심어주려 하신 분”이라고 추억했다.



故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 추모 음악회 [금호문화재단 제공]


추모 음악회는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음악으로만 채워졌다. 그는 최근 오르는 다수의 무대와 달리 오랜만에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공연의 1부에선 1998년 박 명예회장에게 처음 들려줬던 곡과 2005년 고인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준 곡을 선곡했다.
유리구슬이 튀어오르듯 투명하고 깨끗한 슈만의 ‘아베크 변주곡’을 시작으로 멘델스존의 ‘무언가’로 하나하나의 음표를 정성스레 이어 온전한 문장으로 만들었다. 압도적 강렬함으로 가득 채운 차이콥스키의 피아노를 위한 명상곡 D장조와 다채로운 소리의 향연을 들려준 라벨의 ‘라 발스’까지 손열음은 영재 소녀에서 거장의 영역으로 걸음을 내딛는 피아니스트의 오늘을 보여줬다. ‘라 발스’는 박 회장이 마지막으로 찾은 손열음의 공연(2005년 1월)에서 연주한 곡이기도 하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손열음은 “단 한 번도 어떤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지난 10년 동안 가장 많이 상상해 본 무대가 있다면 오늘 이 무대가 아니었나 생각한다”며 “회장님을 알고 지낸 시간보다 떠나신 다음에 시간이 더 많이 흘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장님께서 남겨주신 귀중한 것들을 추억해 주시고 소중하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무대를 마치는 소감을 들려줬다. 늦봄을 적시는 밤비처럼 젖어 든 그의 음성에 깊은 그리움이 묻어났다.
앙코르곡은 바흐의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였다. 다정하고 편안한 음들이 잔잔히 스며 큰 강을 흘렀다. 고인에게 받은 사랑은 손열음을 통해 미래 음악가들에게도 이어졌다. 그는 세계 교향악단에서 활동하는 국내외 연주자들이 모인 ‘고잉홈 프로젝트’를 통해 미래 세대를 끌어주는 자리도 만들고 있다. “100년을 바라보는 음악 ‘백년지대계’”를 목표로 한 고잉홈프로젝트는 매년 음악계에 신선한 바람과 영감을 불어넣으며 차세대 음악가를 지원하며 함께 성장하고 있다. 어느덧 손열음 역시 더 많은 곳에 비를 내리는 선배 음악가로의 길을 가고 있다